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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인 칼럼] 총회개혁, 언론 & 윌버포스와 클라팜파(派)
교회법신문 발행인 송삼용 목사, "18세기 영국 윌버포스가 보여준 사회 개혁에 대한 불타는 사명감, 윌버포스의 개혁정신을 뒷받침하고 후원하기 위해 힘을 모았던 클라팜파(派)의 역할은 총회 개혁의 모델이요 등불"이라고 적어
2022년 08월 11일 11시 11분 입력
 

▲​18세기 영국 사회개혁을 위해 일생을 바친 윌버포스     

 

영국 유학 시절 첫 정착지가 런던 시내의 클라팜이었다. 런던에서 클라팜 지역은 빈민가로 알려져 있으며, 주로 흑인들이 거주하는 지역이다. 

나는 당시 외상으로 끊은 비행기표를 들고 영국 유학길에 올랐던 탓에 월 100여만원의 임대료를 한 푼이라도 줄이기 위해 흑인들의 거주지역으로 알려진 빈민가 클라팜, 엘레펀트카슬 등을 첫정착지로 선택했다. 

그후 브리스톨에 위치한 트리니티 대학에 입학하기 전까지 1년여간 그 지역에 머물렀다. 그런 인연으로 인해 18세기 영국 사회를 개혁하는데 한 축을 이루었던 클라팜파(派)를 알게 되었고, 늘 관심과 연구 대상이었다. 

윌리엄 윌버포스와 클라팜파(派): 총회 개혁의 이정표


클라팜파(派)는 18세기 영국의 사회 개혁을 필생의 사명으로 알고 활동했던 윌리암 윌버포스의 정신적, 학문적, 영적, 재정적 후원자 역할을 했다. 그 결과 윌버포스는 40년간의 노력 끝에 노예무역 제도를 폐지하는 등 강력한 사회 개혁을 이루는데 성공했다.

가령, 윌버포스와 클라팜파(派)가 내놓은 개혁안들에 따라 당시 영국 사회에 만연되어 있던 음주 도박 등이 근절되었고, 24시간 술집 영업도 폐지되었다. 관직 매매 관행도 점차 사라졌다. 가정 파괴나 범죄의 발생률도 줄어들었다. 더 나아가서 노예무역 제도가 폐지된 후 마침내 노예제도까지 철폐되었다. 대신에 영국 사회는 성서 읽기 운동이나 주일학교 보급운동 등이 확산되었다.

18세기 영국 사회 개혁을 이루었던 윌버포스와 클라팜파(派)는 후대에게 사회 개혁의 좌표를 제시해 주었다. 나는 윌버포스가 보여준 사회 개혁에 대한 불타는 사명감, 윌버포스의 개혁 정신을 뒷받침하고 후원하기 위해서 힘을 모았던 클라팜파(派)의 역할은 오늘 한국 사회와 총회 개혁의 등불이요 모델이라고 믿고 있다. 

현재 합동총회는 강력한 개혁이 요청된다. 나는 미력하나마 언론을 통해서 총회 개혁을 부르짖어 왔고, 지금도 그리고 이후에도 총회 개혁을 지속적으로 외치려고 한다. 이에 영국 역사에서 사회 개혁에 성공한 윌버포스와 클라팜파(派)의 역할을 통해 언론을 통한 총회 개혁의 이정표로 삼으려고 한다.
 

▲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합동) 제106회 총회 회무 중   


18세기 영국 사회상: 술 도박 등 향략주의 난무 

17세기 영국은 청교도 혁명으로 한때 종교의 부흥을 이루었다. 18세기 중반부터는 산업혁명으로 인해 경제가 성장하여 부를 누리기 시작했다. 그 영향으로 주변 나라의 경쟁을 이겨내고 세계 각곳에 진출하여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는 명성을 얻을 만큼 세계 최대의 무역 국가로 성장했다. 

하지만 영국의 사회 현실은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일부 부유층이 대지주가 되어 부를 독차지하고, 농민들은 땅을 잃게 되어 빈민으로 전락했다. 공업이 발달하면서 기술자들이 노동자가 되면서 빈부의 격차가 심해졌다. 

사회 풍토 역시 향락주의가 성행했다. 부유층은 향락을 즐기면서 술과 도박을 일삼았고, 빈곤층에서는 꿈을 잃어버린 채 술과 도박에 빠진 경우가 흔했다. 거기에다 성직자들은 지적 우월주의에 빠져서 하류층에는 무관심했다. 

이같은 사회적 현상을 가리켜 당시 유럽에서는 “영국은 종교가 없는 나라인 것 같다”거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야만인”이라는 말들이 나돌기도 했다.

영국 사회개혁에 일생 바친 윌버포스 탄생

그 무렵 장차 영국의 사회 개혁에 일생을 바쳤던 윌리엄 윌버포스가 태어났다(1759-1833). 그는 1759년 영국 요크셔의 킹스톤 어폰 헐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부는 부유한 상인이었고, 헐 시장을 두 번이나 역임한 부유층이었다. 부친 역시 부유한 상인이었다.

윌버포스는 어린 시절(9살) 때 부친을 여의였지만 부를 상속하게 되어 부유층의 특권을 누렸다. 윌버포스 역시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에 따라 한때 술과 도박 등의 유흥을 즐겼다. 그는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복음적 신앙을 이어받았으나 형식적인 신앙을 가졌을 뿐 세상의 유혹을 이겨내기 못했다.

1776년에는 캠브리지대학교 세인트존스 대학에 입학하여 평범한 대학생이 되었다. 하지만 윌버포스는 영국 역사상 최연소 수상이 되었던 윌리엄 피트와 함께 대학시절을 보내며 우정을 나누는 특권을 누렸다. 그런 영향 때문이었던지 윌버포스는 대학을 졸업할 즈음에 정치가가 되겠다는 꿈을 가졌다.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그의 꿈대로 21세의 나이로 킹스턴 어폰 헐의 하원 의원이 되었다. 선거운동에서는 천부적인 웅변 실력을 맘껏 발휘했다. 하지만 그의 당선은 부를 기반으로 한 매표 행위가 개입되었으며, 당선 후에도 사회적 분위기에 따라 흥청대는 생활이 계속되었다.

그러던 중 자신의 친한 선배였던 아이작 밀너와 유럽 대륙을 여행을 떠난 것이 그의 일생을 바꿔놓은 계기가 되었다. 여행 중에 밀러와 종교에 관해 토론을 하다가 신앙을 생각하게 되었고, 그후 회심을 경험했다.  
 

▲영화 '어메이징 그레이스'에서 윌버포스가 연설하고 있다     


회심 이후, 달라진 삶

특히 윌버포스는 필립 도드리지(Philip Doddridge)의 명저 [영혼에 있어서 종교의 성장과 진보]를 읽고 자신의 타락한 생활을 회개했다. 그리고나서 그는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살겠다고 결심했다. 

29살에 회심한 윌버포스는 그 동안 흥청거리며 살았던 쾌락 중심의 삶을 청산했다. 술과 도박을 끊었고, 대신 매일 말씀을 읽은 후 묵상하면서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어려서부터 조부와 부친에게 배웠던 복음적 신앙을 회복하기 시작한 것이다. 복음의 열정에 사로잡혀 아예 정치를 포기하고 성직자의 길로 가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이미 정치가요 수상이 되었던 친구 피트는 윌버포스에게 성직자의 길을 적극 만류했다. 피트는 “기독교의 가르침을 꼭 성직자만 실천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라고 조언했다. 

용기를 내어 정치에 힘을 쏟아부었지만 또다시 한계를 느낀 윌버포스는 이번에는 친구 존 뉴톤에게 조언을 구하면서 “성직의 길을 가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뉴톤 역시 타고난 정치가의 재질과 기량을 언급하면서 “자네의 목회지는 국회일세”라고 조언했다.

노예제 폐지와 사회 개혁은 하나님이 주신 사명

그후 윌버포스는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신앙을 실천해야 하며, 복음 전파 외에도 일상 생활에서 그리스도인답게 행동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미 자신이 쓴 [참된 기독교]에서 다음과 같은 입장을 피력한 바 있다.

“기독교는 가진 자에게 베풀라고 가르친다. 권력자에게 겸허하게 직책에 맞는 책임을 다하라고 가르친다. 겸허한 마음을 가져 부유함을 자랑하지 말며, 권력을 남용하지 말 것이다. 그러면 불평등으로 사회가 갈등을 겪는 일이 줄어든다. ... 기독교는 또한 장차 모든 인간은 차별 없이 살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하지만 이름뿐인 기독교는 이런 일을 실현할 수 없다. 참된 기독교만이 그럴 수 있다. 겉보기로의 기독교가 아니라, 속으로의 기독교가 그럴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런 선한 일들이 실현되고, 정치가 부패하지 않게 하려면, 참된 믿음을 배양해야만 한다.”

이같은 신념에 따라 윌버포스는 정치를 통해서 참된 믿음을 실천하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생각했다. 그때부터 그는 영국 사회에 깊숙이 뿌리내려진 노예 무역제도를 철폐하기 위해 필생의 노력을 다했다.

1781년에는 찰스 미들턴, 토머스 클랙슨, 한나 모어 등의 사람들과 뜻을 모아 노예제 폐지 운동에 나서기 시작했다. 1786년부터는 본격적으로 이 운동에 뛰어 들었다. 그 다음 해(1787년) 10월 28일 그의 일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내 앞에 노예 무역의 금지와 사회(풍속) 개혁이라는 두 가지 큰 목표를 놓으셨다.”

클라팜파(派): 각계 각층의 지도자들로 구성된 개혁의 동역자들

클라팜파(派)는 이 무렵 결성되었다. 여러 정치인들의 도움을 받아 노예제도 폐지 운동에 앞장섰지만 사회 개혁을 방해하는 장벽들로 인하여 어려움을 겪었다. 의회에 상정한 입법안이 번번히 무산되었고, 이를 방해하는 여러 세력들이 있었다.  

그런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해서 윌버포스는 정치인인 클랙슨, 그랜빌 샤프, 작가인 모어, 성직자 존 벤, 은행가 헨리 손턴 등과 뜻을 함께 하기로 하고, 마침내 '클라팜파(派)‘(Clapham Sect)’를 결성했다.

클라팜파(派)를 구성하는 멤버들은 정치인, 경제인, 교육가, 종교인, 문학가, 언론인 등의 각계 각층의 지도급 인사들이었다. 그들의 신앙 배경은 대부분 영국의 복음주의였고, 약 20-50여명이 함께 모여 성경을 연구하고 기도하면서 당시의 사회적 이슈들에 대해 성경적인 해답을 찾았다.  

이들은 지속적인 교제를 통해서 영국 사회 개혁에 대한 비전을 견고히 했고, 당시 사회적 크게 일조했다. 클라팜파(派)는 영국 사회를 개혁하기 위해서 구체적인 전략을 펼쳤다. 

그들 중에서 교육가들은 노예 무역 제도의 실상을 파악하여 보고했고, 언론인들은 노예 무역제도가 비성경적이라는 사실을 전국에 알렸다. 법조인들은 법안을 만들어 개혁안을 제공했다. 또한 기업가들은 이를 위한 재정적인 뒷받침을 했다. 그리고 정치인들은 의회에서 노예 무역제도 폐지를 적극적으로 도왔다.

클라팜파(派)에서 내세운 개혁 운동은 노예 무역제도 폐지에 국한되지 않았다. 그들은 공직자들의 비리, 향락적인 문화, 음주 도박의 근절, 그리고 신성모독 등을 추방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이처럼 클라팜파(派)의 강력한 지원과 후원에 힘입어 윌버포스는 마침내 1789년 5월 12일, 하원에서 처음으로 노예무역 폐지를 공론화 시켰다. 

하지만 단 한번의 노력으로 개혁을 이룰 수 없었다. 클라팜파(派)는 더욱 구체적인 증거를 모아 자료를 제공하면서 사회적 분위기를 확산시켰다. 그리고나서 윌버포스가 1791년에 다시 폐지 법안을 의회에 제출했으나 또 부결되었다.

목숨을 내건 개혁 운동, 40년만에 결실

그 다음 해(1792)에는 ‘즉각 폐지 대신 점진적 폐지’를 주장하여 법안을 통과시켰으나 그 이듬해에 프랑스와 전쟁이 일어나 통과된 법안이 무산되었다. 그후 윌버포스와 클라팜파(派)들은 1798년부터 다시 노예무역 폐지 운동을 부르짖으면서 150차례나 의회 내 논쟁을 벌였고, 1805년까지 무려 11번이나 법안이 무산되었다. 

그러나 윌버포스는 포기하지 않았고, 클라팜파(派) 역시 윌버포스의 개혁안을 적극 지원했다. 특히 윌버포스는 수 차례나 목숨을 잃을 뻔한 위험을 겪었다. 심지어 오랜 투쟁으로 인해 건강이 악화되어 척추가 휘고, 위장병, 폐 질환, 등의 고통에 시달렸다. 많은 유산도 개혁을 위해 다 쏟아부어 재정적인 압박도 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윌버포스는 한번도 불의와 타협하지 않았다. 오히려 법안 통과가 무산될 때마다 실의에 빠진 동료들을 격려하면서 사회 개혁을 부르짖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1807년 2월 23일 노예무역 폐지법안이 통과되었다. 하지만 윌버포스는 오랜 투쟁 끝에 얻어낸 놀라운 개혁의 결실에도 불구하고 만족하지 않고 또다른 개혁의 깃발을 들었다. 그는 노예제 자체를 완전히 폐지해야 한다는 또다른 개혁안을 내놓았다. 

윌버포스가 내놓은 개현안을 바탕으로 1823년에는 노예제도 폐지를 위한 모임을 결성했다. 그는 노예제가 범죄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의 건강이 악화되어 1825년에는 의원직을 내놓고, 뒤에서 개혁 운동을 지원했다.

그후 건강이 악화된 가운데서 윌버포스는 1833년 7월 26일 영국의 모든 노예를 1년 내에 해방한다는 의회 결정 소식을 병상에서 들었다. 

이로써 윌버포스는 청년 시절에 하나님께 받은 사명을 다 완수했다. 그가 평생 동안 흘린 눈물과 땀과 피의 결실이었다. 하지만 그 놀라운 기쁨을 더 이상 누리지 못한 채 사흘 뒤 눈을 감았다. 

현대판 윌버포스와 클라팜파(派) 출현을 기대한다 


윌버포스가 일생 동안 싸워온 사회개혁 운동과 그를 뒷받침하고 후원한 클라팜파(派)의 헌신은 현재 총회 개혁의 방향성을 제시해 준 모델이요, 생생한 교훈이다. 총회의 개혁은 혼자 이룰 수 없다. 개혁을 단행하려면 윌버포스의 정신으로 무장된 지도자들과 이를 뒷받침해줄만한 현대판  클라팜파(派)의 출현이 절실하다. 

개혁을 열망하는 사람들이 뜻을 모아야 하며, 개혁의 의지를 굽혀서도 안된다. 개혁은 계속되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요, 성경의 가르침이다.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은 "성경이 가라고 하면 갔고, 멈추라하면 멈췄다." 개혁의 완성은 없으며, 역사의 종말이 올 때까지 개혁은 진행되어야 한다. 

하지만 총회 개혁은 특정인이 혼자 이룰 수 없다. 언론은 개혁의 단초를 제공할 뿐 개혁을 완성할 수 없다. 나는 언론 사역에 올인하면서 개혁의 필요성을 부르짖었고, 비리와 불법을 끊임없이 지적하고 비판해 왔으나 철벽같은 교권의 장벽에 부딪힌 적이 있다. 

그런 장벽들에도 불구하고 나는 개혁의 외침을 멈추지 않았다. 총회의 교권을 남용한 세력들에 의해 21개월간의 출입금지, 목사직 정지, 면직을 당했고, 그것도 부족하여 신문배포·​구독·​광고·​후원금지 등의 공문을 전국노회와 산간벽지 교회까지 보내는 등의 언론 말살 및 인격권 침해의 무자비한 폭거에도 한치의 양보없이 개혁의 목소리를 높혔다.

심지어 총회 지도부 인사들의 카지노 도박 의혹이 국가 기관에 진정되어 사건을 맡은 검사의 요청에 의해 카지노 현장을 찾아 혼자 필리핀까지 날아갈 만큼 불법과 부정 부패 청산을 위해 집요함도 보였다.

마치 칼빈이 심장을 바쳐서 개혁에 앞장 섰던 것처럼, 나도 총회 개혁을 위한 목소리와 행동을 중단하지 않았다. 사실 영적인 면에서 보면 "나는 벌레만도 못한 죄인"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혁을 포기할 수 없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과 개혁신학의 요구 때문이다. 

그런 관점에서 나는 지속적으로 언론 매체(크리스천포커스, 교회법신문, TV CFC)를 통해 중단없이 개혁을 부르짖으려 한다. 하지만 총회의 개혁은 힘을 모아야 한다. 전국의 뜻있는 분들이 마음을 모아야 하며, 기도하면서 연대해야 가능한 일이다. 

  

  

우리 총회는 개혁신학을 정체성으로 삼고 100여년을 달려왔다. 지난 100여년간 엄청난 저력을 쌓았다. 분에 넘치는 하나님의 사랑과 복을 받았고, 지금은 한국장로교회에서 장자총회의 자리를 굳혔으며, 세계장로교 총회 중에서 최대규모로 성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엄청난 위상에 걸맞지 않고 내부적으로는 불법이 난무하고, 행정 역시 여전히 대부분 아날로그식이다. 소위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담아낼 만한 그릇을 준비하지 못한 격이다.

정말 총회를 내 집처럼, 내 교회처럼 다듬고 갈고 빛내줄 리더가 거의 없는 상태며, 대부분 총회장, 임원 등의 감투만 차지하고 내려가면 그만인 식이니 발전이 정지된 상태다. 선진들이 피땀흘려 쌓아놓은 총회가 발전은 커녕 정지된 채 시대를 선도하지 못하고 있고, 더 심각한 것은 총회장과 임원들에 의해 불법이 그치지 않는다는 부분이다. 

총회장과 임원들이 감투만 쓰고나면 헌법이나 규칙, 결의 등을 헌신짝 처럼 버리고 교권을 남용하는 바람에 그 억업과 불법 앞에 수많은 사람들이 피눈물을 흘리고 있다.
이상하게 총회장과 임원직에 오르기만 하면 불법자의 편을 들고, 불법을 정당화시키고, 불법을 합법으로 인정하는 경향이 대수다. 

그리고나서 총회장직과 임원직을 마치면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고 그런 불법들이 계속 대를 잇고 있으니, 하나님께서 그토록 좋아하셔서 구약에 무려 250번이나 기록된 "정의"가 설자리가 없으며, 거의 실종된 상태다. 

대표적인 사례들은 충남노회 사건, 성석교회 사건 등은 장로교 헌법은 고사하고 대법원 판결까지 무시하면서 국가의 법치질서도 무너뜨리고 있다. 순천노회 사건은 장로교 헌법을 내팽개친 채 상소도 없이 권징을 임원회에서 풀어서 홈페이지에 등재하는 불법을 자행했다.

몇년 전에는 중부노회 분쟁 과정에서 남의 교회 재산을 탈취하듯 등기를 바꾸다 사법에서 무효 결정이 나왔는데도 총회는 그런 불법자들의 편을 들더니 마침내 노회를 분립시켜 주는 괴상한 일이 벌어졌다.

최근에는 경상노회 분쟁에서 사법의 가처분에서 4차례나 패한 쪽의 편을 들어주면서 결국 노회를 분립시켜 준다는 황당한 결정을 했다니 더이상 말이 나오지 않는다. 더 기막힌 것은 경안노회 사건에서 교회 땅을 팔아먹다 들통나고, 재정 장부를 탈취해 가도 총회가 화해중재한다고 나서더니 불법자들은 멀쩡하고 목회자만 18개월 징계를 당하게 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런 실상들은 총회장과 총회임원들이 총회의 헌법과 질서를 무너뜨리는 장본인들이며, 성총회를 허무는 들여우가 되어버린 듯한 생생한 사례들이다. 그들은 대부분 총회장, 임원 당선되었다고 축하예배 드리고, 꽃다발 받고, 현수막 내걸고 영광을 받았을턴데, 지금 실상으로는 총회장과 임원들이 총회를 망하게 하는 암초덩어리가 된 모양새니 실로 가슴아픈 일이다.  

이런 상황이니 언론에서 보고만 있을 수 없으며, 총회원들이 구경만 할 수 없지 않는가! 최근 총회의 개혁과 변화를 꿈꾸면서 [합동포럼]이라는 단체가 태동한 소식은 무척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런 단체라도 깨어서 현대판 윌버포스가 되어야 하겠고, 윌버포스를 지원했던 우리 시대의 클라팜파(派)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윌버포스와 클라팜파(派)처럼 1-2년 사이에 안되면 5년 10년, 심지어 40년이라도 계속하여 개혁을 부르짖어야 하며, 더 나아가 우리 당대에 못하면 후대들에게 총회 개혁의 과제를 물려줘서 좋은총회 바른총회 품격총회를 세워서 주님을 맞이하자는 것이 합동포럼의 비전이요, 필생의 사명이라니 그나마 총회의 희망이 보이는 듯하다. 

송삼용 목사/ 교회법신문 발행인, 고려대학교 법학박사 과정

 


원동현 기자 nicehhyun@hanmail.net